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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치고 - 살아온 자잘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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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지은이)

202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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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앞선 두 권의 책조차 대부분 괄호 밖 나의 모습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는 외부로 드러난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 지독한 독거형 인간의 (괄호 속) 이야기

《괄호 치고》의 저자 박주영 판사는 혼자라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독거형 인간이다. 학교를 그만둘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지만 등교를 힘들어했던 저자는, 사법연수원 시절 출석일수 미달로 퇴원 경고를 받을 정도였다. 변호사를 하다 법원에 온 것도 “사람의 그 살벌하고 축축한 콧김과 입김을 바로 앞에서 맞는 게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틀렸다. 법정에 있는 모든 이의 희구와 책망은 정확히 판사를 겨냥했고, 그는 그 엄청난 에너지파에 당황했다. 그러나 까만 법복 입은 판사는 받은 돈 돌려주며 사건 못 맡겠다고 무를 수 없다. 저자는 까맣게 타버린 마음을 괄호 속에 묻고 판결문을 썼다.
문장부호 중 하나인 괄호는 주로 뭔가를 부연 설명할 때 쓰이고, 밖으로 표현된 단어나 문장 뒤에 붙어 그것에 숨겨진 더 자세한 의미를 알려준다. 잘 가라고 했지만 괄호 치고 가지 말라는 말을 덧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애써 삼키고 묻어둔 말들이 있다. 도합 102년이라는 형량을 선고하며 일명 오프라인 N번방 사건의 피고인들을 엄벌하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며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등 특이한 양형을 쓰는 따뜻한 판사로 알려진 저자 역시 지금껏 국가기관으로서 공적 의사를 드러냈을 뿐이다. 《괄호 치고》는 저자가 매일 자신만의 전투를 치르고 돌아와 괄호를 여닫으며 남긴 사적인 삶의 흔적이다.

“피투된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기투해야 한다.
주사위를 던져야 게임이 시작된다.”

●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나만 줄 수 있는 풍경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끼여 산다. 판사가 원고와 피고, 검사와 피고인 사이에 끼여 있듯 우리 역시 상사와 후배, 눈치와 상식, 도리와 본심 사이에 끼여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많다. 만원 지하철에서 어깨를 움츠린 사람처럼 이쪽과 저쪽 모두를 살피며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일까. “문짝과 문설주 양쪽에서 부하 걸린 삶”을 산다고 느끼는 저자는 늘 고민한다. 자신이 “정의롭고 아름다운 문장”인지,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인 건지 말이다.
정답이 없는 문제지만, 저자는 명료한 문장들로 자신이 고수하는 삶의 태도를 전한다. 사람에게 “안부를 묻”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되, 복수용 나이프에 새겨진 문구처럼 “내가 남기는 모든 상처가 치명적”일 수 있도록 치열해야 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하찮게 여겨지더라도, 지금 서 있는 곳이 세상의 귀퉁이더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 속한 풍경의 최적임자“이기 때문이다.

“책은 인간이 절멸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 사라(살아)지지 않기 위한 페이지 넘기기

살다 보면 호된 상실을 겪는다. 사랑에 실패하고, 믿었던 이가 배신한다. 별거 없는 삶이라 생각했던 걸 비웃듯 건강을 잃는다. 이럴 때 인간은 곤두박질친다.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닌, 되는대로 살아지는 삶에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에 앓아누울 수만은 없다. “이렇게 살다 보면, 살아지다 보면 자신의 존재는 사라질지 모른다.”
벼린 감각을 지니고 사는 독거형 인간들의 상실은 자주, 세게 찾아온다. 저자는 그럴 때 LP를 걸어놓고 페이지를 넘긴다. 시를 읽으며 “흔하지만 고유한 것들의 아름다운 순환”을 느끼고, 책을 집어 “즐거움, 행복, 지적 충만 같은 것들”을 반복 재생하고, 글을 쓰며 위안을 받는다. 두툼한 기록 읽고 판결문 쓰는 게 판사의 일인데, 왜 쉬는 시간마저 남이 쓴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쓰려 페이지를 넘기는 걸까. “책의 세계를 통과해서 나오면, 책 밖의 세계가 달라”지고, 글을 써야만 “한순간이나마 세상에 몰입하여 그 일부로 살았음을” 느낄 수 있어서다. 살아갈 수 없다면, 그리하여 사라(살아)지고 있다면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한 걸음만이라도 더 나은 세상에서 죽고 싶다.
나는 적어도 희망을 껴안은 채 죽을 것이다.”

● 지겹도록 쓰여야 할 (확실한) 고통

법대에 오른 판사는 슬픔의 한가운데서 비극을 주재한다. 그곳에는 피기도 전에 진 아이들과 여자의 눈에서 흐르는 “치렁치렁한 눈물”이 가득하다. 법정만 그런 게 아니다. 죽고 다쳐서, 떠밀리고 빼앗겨서 우는 이는 어디에나 있다. 저자는 판사이자 한 개인으로서 이번에도 사회의 차별과 빈곤,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폭력과 가난밖에 경험한 게 없는데 쓰레기만 배설한다고 타박받는 아이들, 파지 줍다 절도범으로 몰려 즉결심판받는 노인, 자신을 강간한 아버지의 선처를 구하는 친모를 등지고 앉은 딸까지 이미 본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만 바뀐 것 같다. 정말이지 비극은 지겹지도 않은지 돌고, 돌고, 또다시 돈다.
저자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의미 없는 동어반복만 하는 게 아닌지 회의가 든다. 세상이 너무 요지부동으로 완강해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누가 더 식상한가, 누가 더 빨리 지치나 힘겨루기 하는 것 같다.” 그도 알고 있다.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희망보다 절망이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그러나 잠시 넘어졌던 저자는, 얼른 털고 일어나 다시 쓴다. “살아남은 자로서 나의 유일한 용도는 이 글을 쓰는 것뿐”이라고, “남은 자의 참된 애도만이 공허의 한 조각”을 메운다고, “유보할 인권이나 생명, 재산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없다”고. 그는 오늘도 연대와 공감, 낙원으로 가는 길 위에 서서 외친다. “이 길이야, 이리로 와, 어이, 거기! 발밑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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